「화마와 고독한 싸움 23년」 마감
고기종소방장 진화중 순직
[한국일보]1990-09-21 22면 1253자 사회 기획,연재
◎7천여회 출동 6백여인명 구해/서울시민회관 화재등서 숱한공/부인 소식듣고 실신… 병석노부 눈물만서울시민회관 대연각호텔 등 대형화재현장에서 「불나비특공대」로 많은 공을 세웠던 서울 종로소방서 세종로파출소 고기종소방장(48ㆍ서울 강서구 화곡3동 주공아파트)이 19일밤 진화작업중 실족사해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있다.
고씨는 이날밤 불이난 서울 중구 의주로2가 녹지대안에 있는 지하 송ㆍ변전실에 뛰어들었다가 11m아래로 떨어져 소방생활 23년을 불운으로 마감했다.
지난67년 소방관이된 뒤 종로소방서에서만 23년9개월을 근무해온 고씨는 그동안 7천여번을 출동했으며 6백여명의 인명을 구조한 베테랑소방관이었다.

동료들은 그를 『의협심이 강하고 동료애가 많은 모든 사람의 다정한 벗이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화재현장에 제일먼저 달려가 「제트기」로 통했으며 너무 일에 집착한 나머지 「멍청하고 우둔한 사람」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지난72년 12월 서울시민회관 대화재는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직분에 충실한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고였다.
당시 처음 도입된 굴절사다리차의 운전요원이었던 고씨는 화단이 장애가 되어 사다리를 대지 못해 모두가 안타까워 할때 수십차례의 시도끝에 사다리차로 화단을 넘어 건물벽에 바짝접근시켜 60여명의 학생을 구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만약 사다리차를 건물벽에 붙이지 못했다면 각도가 맞지 않아 많은 생명이 희생당할뻔 했다』고 동료 이영주예방주임(48)은 회고했다.
고씨는 이에 앞서 71년 12월의 대연각호텔화재와 74년10월의 뉴남산호텔화재,74년11월의 대왕코너화재 등 대형화재 현장에서 소방특공대로 수십명의 인명을 구해냈다.
그가 재직중 받은 표창만도 내무부장관,서울특별시장 표창 등 13회나 된다.
7형제의 장남인 고씨는 박봉으로 동생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장가도 보내는 등 집안의 기둥이었다.

노부모와 부인,중ㆍ고생 자매와 함께 월급 46만원으로 어렵게 살아온 고씨는 전세로 전전하다 몇년전에야 비로소 21평짜리 주공시범아파트를 겨우 장만했다.
부인 김00씨(40)는 참변소식을 듣고 실신,남편의 시신이 안치돼있는 고려병원에 입원중이다. 중풍에 시달리는 아버지 고경환씨(72)는 병석에 누워 눈물만 흘리고 있다.
같은해 종로소방서에 들어와 23년동안 한솥밥을 먹어온 이영주주임은 『남다른 긍지와 신념을 갖고 살아온 동료의 죽음에 내몸 반쪽이 없어진듯 허탈하기만 하다』며 고씨의 넋을 기렸다.
고소방장에게는 1계급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이 추서되며 장례식은 22일 종로소방서장으로 연수된다.<이충재기자>
모범 소방관의 죽음(행간)
[경향신문]1990-09-21 14면 952자 사회 컬럼,논단
20일 하오7시쯤 서울 종로구 평동 고려병원 영안실 주변은 2백여 일선소방관들의 끊임없는 오열과 탄식,자신들 처우에 대한 분통 등으로 뒤섞이고 엉켜있었다.
『선배님,20년 소방관생활의 끝이 정녕 이런겁니까』
『선배님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천직을 지켜가렵니다』
소방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소주잔을 들이키면서 19일밤 화재현장에서 진화작업을 하다 순직한 동료 고기종소방장(48ㆍ종로소방서 세종로파출소)의 죽음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숨진 고소방장은 이날 밤11시쯤 신고를 받고 동료 18명과 함께 화재현장인 중구 의주로2가 63 한전건물 지하1층 자재창고에서 진화작업을 하다 발을 헛디뎌 지하3층으로 떨어져 변을 당한 것.
고소방장은 출동 40분만에 능숙한 솜씨로 불은끈뒤 재점검을 하기 위해 지하3층으로 내려가다 직경 2m가량의 맨홀로 떨어졌는데 동료들은 『불이 완전히 꺼진것을 끝까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근성이 죽음을 불렀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한 이날 화재는 지나가던 행인이 지하1층 환기구틈으로 버린 담뱃불이 창고에 쌓아둔 비닐 등에 옮아 붙으면서 일어난 것으로 밝혀져 동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고소방장이 소방관이 된것은 군제대직후인 지난67년 1월.
이후 그는 행정업무 등 단한번의 「외도」도 없이 순직한 이날까지 시뻘건 화마와 싸워가며 무수한 인명을 구해냈다.
대왕코너ㆍ대연각ㆍ시민회관화재 등 대형 화재사고때마다 선봉에 섰던 그는 특히 시민회관화재때 고가사다리를 직접조작,맨먼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많은 인명을 죽음일보직전에 건져내기도 했다.
내무부장관표창 등 각종 표창만도 13차례나 받은 그는 일에 관한 한 너무나 「똑소리 나도록」처리해 「도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큰딸 주현양(15ㆍ명덕여고1)은 『아빠가 늘 조금만 쉬고 싶다고 하시더니 이제 영원히 쉬게 됐다』며 울부짖었다.<손동우기자>
한 소방관의 순직(사설)
[동아일보]1990-09-22 02면 1364자 종합 사설
나라살림을 이렇게 엉망으로 꾸려가도 파산지역에 이르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정부여당 연석회의같은 국회,물가등귀,페르시아만사태에도 불구하고 마구 낭비하는 에너지정책,증권시장의 혼란 등등 어리석고 멍청한 짓만 골라하는데도 나라살림이 무너져 내리지 않고 멀쩡하게 굴러가는데 별나게 느껴진다.그 까닭은 뭣인가.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존귀하지 않은 무명민초의 끈질기고 성실한 노력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들이 애쓰고 힘들인 덕분으로 이 나라가 이나마 지탱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그 구체적인 예증을 서울 종로소방서 세종로파출소 고기종소방장의 순직에서 본다.
바로 이런 분들 덕분으로 우리는 이 만큼이라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고씨는 지난 19일 밤 불이 난 서울 중구 의주로 2가 녹지대 안에 있는 지하 송변전실에 뛰어들었다가 11m아래로 떨어져 순직했다. 소방생활 23년이 그렇게 마감됐다. 고씨는 지난 72년 12월 서울시민회관 대화재때 당시 처음 도입된 굴절사다리차를 수십차례의 시도끝에 화단을 넘어 건물벽에 바짝 접근시켜 60여명의 학생을 구출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고씨는 이에 앞서 71년 12월의 대연각호텔 화재,74년 10월의 뉴남산호텔 화재,74년 11월의 대왕코너 화재 등 대형 화재현장에서 소방특공대로 수십명의 인명을 구해냈다.
노부모와 부인 중고생 자녀와 함께 월급 46만원으로 고씨는 어렵게 생계를 꾸려왔다. 남편의 참변소식으로 부인은 실신,병원에 입원중이고 중풍으로 누워 있는 칠순의 아버지는 병석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
우리는 고씨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다. 이런 무명민초의 착하고 끈질긴 노력을 딛고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시한 채 호사를 즐기고 누리지 않았을까. 열악한 근로환경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진즉 결딴나고 부서지고 깨어졌을 것이다.
위험수당이랍시고 월 1만1천원이 소방관들에게 지급된다. 국민의 생명의 손실과 재산의 소실을 막기 위해 목숨을 잃어도 국립묘지에 안장되지도 못한다. 군인이나 경찰과는 달리 소방관의 경우 임무에 대한 구체적 명시가 법제화되어 있으나 생명 신체에 대한 보훈(순직 공상)에 대해서는 특별규정이 없다. 또 소방관은 연말연시 설날 대보름과 석탄일 성탄일 등 공휴일이면 으레 비상화재 특별경계근무에 임하게 된다. 차례나 성묘도 못한다. 그런데도 시간외 근무수당이나 공휴근무수당이 별도로 계상되지 않고 있다.
보통사람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떠들어대지만 고씨와 같이 박봉으로 생명을 걸고 온힘을 쏟아 이 사회를 지탱해가는 사람을 눈여겨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의 헛구호일 뿐이다. 고씨의 순직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깊이 이 사회의 지주에 대해 경의와 애도가 있어야 한다. 정치 경제 엘리트의 참회와 반성이 거듭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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